존재론적 사랑이 아닌 소유론적 사랑이 집착을 가져온다.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.
산길 걷는 나그네가 자신을 유혹하는 치명적인 꽃을 만났을 때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. 아무런 생각 없이 나그네는 소유에 대한 갈망으로 그 꽃을 꺾는다. 그리고 그것을 그 꽃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. 하지만 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. 꽃은 꺾이는 순간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. 이와는 다르게 나그네가 모종삽으로 그 꽃을 캐와 자신의 정원이나 뜰에 심어놓는다.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정성껏 꽃을 가꾼다. 그러면서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맞도록 가지를 전지하여 자신의 꽃으로 가꾼다. 이 역시 착각에 속한다. 이 꽃 역시도 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. 마지막으로 나그네는 소유에 대한 갈망을 뿌리치고 그 아름다운 꽃을 있는 그 자리에서 완상하는 것으로 만족한다. 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참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?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세 번째의 사랑이다.
이 이야기는 에리히 프롬의 저서 『소유냐 삶이냐』에 나오는 우화다. 에리히 프롬은 이들 가운데 세 번째 유형을 존재론적 사랑으로 보았다. 존재론적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태도다. 즉 그것은 꺾지 않는다. 소유하지 않는다. 소유란 꺾는 것이다. 꺾는 것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. 소유론적 사랑은 상대의 죽임이다.
내 지난날의 사랑은 소유론적 사랑이었다. 상대에 대한 지배로 점철된 사랑이었다. 이것이 집착을 불러왔고, 이로 인해 상대가 나를 원망하며 떠나게 만들었다.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가 변했을 때 배반감이 들기보다 오히려 더 잘해주고 싶은 감정이 들어야 한다고 사랑의 한 전문가는 말한다. 상대가 변했을 때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면 그는 이미 상대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.
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? 역지사지의 태도로 상대를 바로 보고 생각할 때 집착의 굴레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? 하고 나는 내 지난 경험을 떠올려 생각해본다.
